마무리

다난했던 2011년도 끝났다. 슬픈 일, 힘든 일, 어려운 일도 많았지만 즐거운 일, 기쁜 일, 감사한 일도 많았다. 책을 읽기보다는 음악을 더 많이 들었던 한 해였고 사람들과 이야기하기보다는 나 혼자 생각할 일이 더 많은 한 해였다. 그러다 한없이 감정적이 되기도 하였고, 또 그러다 한없이 체계적으로만 빠져들기도 하였다. 그런 사이에서 어떻게든 균형을 잡아 보려고 노력은 하였는데 얼마나 성과를 거둔 셈인지는 더 두고 보아야 한다. 

취향의 변화가 있었다면 음악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듣게 된 것이다. 고백하자면 적어도 올해 초까지 내게 음악은 순간의 즐거움을 위한 취미에 더 가까웠다. 유려하게 흐르는 패시지와 비트를 향유하는 느낌은 어쩌면 고급한 질감의 섬유를 매만지는 즐거움에 더 가까웠는지도 모른다. '듣는다'는 행위였으되, 보다 물리적이고 즉각적인 감각의 취미가 음악이었다.그런데 올해 어떤 순간을 계기로 이러한 취미가 좀 더 복잡한 형태로 변화하였다. 
 
가끔 결국 모든 것의 근원은 무상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범상하게 친구들을 만나고 하루를 보내고 회사에서 일을 하고 그러다가도, 문득 모든 것이 참 헛되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종래는 스러지고 마는 이 모든 것들을 삶의 일부로 납득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이 종종 고개를 든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각지대가 열리면서 거기 조용히 숨어 있던 허망한 마음이 아무 기척없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상실이 아니라 각성에 더 가깝다. 무언가가 본래부터 없었음을, 모든 것의 끄트머리는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올해도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날 때도 많았지만, 그런 격한 감정 소모보다도 대체 이 끝에 무엇이 있길래, 대체 무엇을 위해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러고 있나 하는 허망한 마음이 들어서 어려울 때가 많았다. 

음악은 올해의 그런 고투의 과정에서 가장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냥 음반 한 장을어놓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었을 뿐인데, 어느 순간, 모든 것이 덧없지만 그래도 거기에 어떤 의미가 있다는 모순을 자연스레 납득할 수 있는 순간을 여러 번 경험했다. 줄거리만 들어보면 고루하고 유치한 연애담인데 음의 흐름에 귀기울이다 잠깐 비의에 다가갔다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냥 텅 비어 있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덧없음, 허망함, 혹은 무상함의 형태가 왠지 어렴풋이 떠오른 듯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이 모두가 전부 다 내 착각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덕분에 올 한 해가 그럭저럭 지나간 것 같다. 좀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는 음악을 약간 경외하게 되었고, 음악을 통해 조금은 사색할 줄 알게 된 것도 같다. 

또 다른 변화는...사실 꽤 여럿이다. 일일이 늘어놓으면 너무 길어지니까 가장 중요한 한 가지만 여기에서 덧붙이자면 이 블로그를 닫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제는 이사 좀 안 하려 한다고 큰소리를 땅땅 쳤는데 또 거짓말을 하게 됐다. 이미 올렸던 글을 지우지는 않으려고 한다. 일단 좀 쉬고, 다시 마음 내킬 때 마음 내키는 곳에서 시작하려고 한다. 아마 그렇게 오래 쉬지는 않을 것이다. 

그동안 와주셨던 분들, 감사합니다. 온라인 인연은 신기하니까 언젠가 어디선가 다시 만나게 될 거라 믿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

turtle 드림

뉴욕 다시, 그리고 언젠가

오늘 뉴욕에 다시 왔다. 지난 번 왔던 뒤로 겨우 반 년 조금 넘게 시간이 지났다. 그 몇 달 안 되는 사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바뀌었나.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없어질만큼 거칠고 큰 변화들이 닥쳐왔다. 널빤지 한 쪽 들고 폭풍우가 몰려오는 해변에서 파도타기를 해야 되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인지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일단은 해 보고 싶었다. 도망가면 나는 편해지겠지만, 내 몫의 파도타기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해변에 남은 사람이 한 명 더 줄어드는 것뿐이고, 그만큼 더 적은 수의 사람들이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한다.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나 자신을 깨닫고, 와, 내가 진짜 꼰대가 되긴 됐나 보다 문득 생각하기도 했다. 일과 나를 분리해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또 말했으면서 어느 새 내 자존심을 일에 너무 깊이 결부시키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제 파도가 조금 잦아들기는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까 나도 모르는 사이 꽤 많은 상처를 받긴 했던 것 같다. 비행기 좌석에 구부리고 앉아 돌이켜 보는 내내 서럽고 슬펐다. 

이대로 나를 두면, 나는 굉장히 '노회한' 사람이 되어 버릴 것 같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알게 됐는데, 그것이 사실 옳은지 틀린지를 생각해볼 사이도 없이 그냥 내가 많은 것을 안다는 그 자체에 들떠 버릴 것 같다. 자만 혹은 오만이 커지고 내 상처는 내버려 둔 채 다른 사람들을 닥달하면서 얕은 위안을 얻으려고 할 것 같다. 왠만하면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당분간은 좀 나한테 집중하려고 한다. 블로깅도 잠시 쉬려고 한다. 당분간은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나하고 얘기를 좀 많이 해보고 싶다. 뉴욕이든 어디든, 다음 번에 다시 여행을 떠날 때에는 좀 더 산뜻한 기분으로, 좀 더 나를 잘 보면서 갔으면 좋겠다. 아마 그때 쯤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

오 르브와. 


이런

휴가는 내일 모레인데 주문한 필름이 아직 안 왔다. 내일 안 오면 결국 날짜를 못 맞추는 셈인데, 아무래도 그런 사태가 벌어질 듯한 예감이 강력하게 닥쳐온다. 진짜로 B&H에 찾아가서 필름을 사야 할 판국이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젠 동네의 어지간히 큼직한 카메라 상점에서도 괜찮은 필름을 구입하기가 아주 어렵다. 대중적인 가격의 필름도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이긴 하다. 그래도 가끔은 특정한 색채를 내주는 필름이 쓰고 싶다. 일단 얼마나 더 오랫동안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고...무엇보다도 이번에 뉴욕에 가면 클로이스터를 다시 한 번 제대로 찍고 싶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무슨 공모전에 아이디어를 냈는데 가작 정도로 당선이 되었다. 약소하지만 상금도 있고, 이것을 빌미로 내 돈 안 내고 서울에 놀러갈 기회가 생겼다. 그런데 나쁜 소식은 그 시상식이 내가 가장 바쁜 주간에 잡혔다는 거다. 24일 이후가 되었으면 아주 좋았을 텐데 그 직전 주간, 그것도 수요일이 되어 타이밍이 너무 안좋다. 아무래도 못 갈 확률이 아주 높다. 그냥 약간의 가욋돈이 생긴 것으로 만족하는 편이 좋을 지도 모른다. 아주 억울하지만은 않다. 서울에 가도 즐겁겠지만, 여기서 일하다 조용히 연말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한편 이 사진은 지난 일요일 그린레이크에서 찍은 것. 시애틀 겨울날 답지 않게 아주 날이 쾌청해서, 이런 날 안 나가면 억울하다는 마음가짐으로 결연히 밖에 나가 산책을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주차하는 데 20분 넘게 돌았지만 보람이 있었다. 공기가 차게 식은 목화솜 이불 같은 날이었다.




휴가

다음 주에는 휴가가 잡혀 있다. 올 한 해 너무 힘들었다고 발버둥을 쳐서 회사와의 빅딜끝에 얻어낸 휴가다. 가는 곳은 뉴욕이다. 

사실 나는 내년에 슬슬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계획하고 있다. 이번에 돌아가면 동부까지 언제 다시 올 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조금 무리하여 시간을 짜냈는데, 지금 상황 돌아가는 것을 보면 과연 제대로 쉴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냥 메일에 회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온갖 데이터 다 들어 있는 업무용 거대 노트북을 가져가야 할 지도 모른다. 주경야독이 아니라 주놀이밤근무를 해야 할 처지다. 

그래도 일단은 몸과 마음을 다 바쳐서 놀려고 한다. 지난 번에 미처 다 챙기지 못한 미술관들을 들러보고 좀 느긋하게 맛있는 것도 먹으러 가고 싶다. 이번에 가면 몇 년은 못 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니 많은 것을 해 두고 싶어진다. 이렇게 쓰고 보니까 휴가가 아니라 무슨 정리를 하러 가는 듯한 기분이다. 왠지 벌써 아쉽다. 

어느새

12월이 되었다. 이제 꼼짝없이 연말이다. 하지만 마음은 아직 저만치 한 해의 중간 어디쯤에서 둥둥 떠다니는 기분이다. 연초도 아니고, 여름 즈음 있었던 일들이 그냥 작년 일처럼 느껴진다. 최근 몇 년 간 정말이지 한 해 한 해 바쁘고 정신없이 지나가지 않은 해가 없으나 올 한 해 만큼 밀도가 심했던 해가 없었다. 좋다면 좋은 일이다. 올해만큼 진지하게 삶의 무의미함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사춘기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물어보는 질문을 가졌으나 당연히 답은 찾지 못했다. 그냥 꾸역꾸역 살면서 학교를 다니고 연애를 하고 그러다 어느새 잊어버렸다. 그러다 이제 와서 갖게 된 생각해 보니, 원래 삶이란 무의미한 것이고 견디는 것이 맞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포인트다. 결국 무의미한 것이니까 너무 집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초여름 아침, 햇볕에 따뜻하게 데워진 모래사장을 생각하자. 바닷바람이 살갗에 희미하게 느껴진다. 손을 고운 모래사장에 넣어 모래를 집어올린다. 고운 모래는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며 몇 알의 모래알을 손바닥에 남긴다. 그리고 약간의 온기를 남긴다. 중요한 것은 그 온기다. 손가락에서 빠져나간 모래알에 마음을 빼앗겨, 온기를 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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